가을의 명도

2021년 9월 12일 일 오후 9:20



무를 수 없는 겨울이 가을에 비친다

대지는 알알이 굳은 팔레트와

얼룩덜룩 마른 붓을

가만히 둔다

가을부터 색은 흐르지 않는다



밑그림을 뻑뻑이 긋다

시든 붓을 매만진 계절은

제게 죽음의 명도를 묻는다

삶에서 죽음까지,

밝음에서 어둠까지,

열에서 영까지……



열 발자국 방황해본다



햇사과 검게 병든 벌레집

숨어 익는 산머루 골짜기

잠자리 움켜 안은 이끼돌

흙길 산길 개울 길 저물고



시뻘건 대추나무의 옆길.

고목 평상 삼베옷 노인은

떠밀려 자란 손톱 끝으로

백발 머릴 빗으며 말했다



색은 서로를 보듬더라

함께 내리쬐더라 죽음 한 폭에



덜 여문 계절도(圖)에

가을볕이 걸터앉는다



밑그림 한껏 지운다

부시게 선명한 색채뿐이

가을 낯이다



그해는 단풍이 환했다.





-

이제 온 색을 덮고



칠흑 속에 꿈꿀까.



슬몃 누인 몸에는



綠, 靑, 赤 1)



계절 빛이 쌓이어



백색 잠이 흘렀다.





삶의 적층 죽음의 찬란

영에서 열까지

겨울의 골자







1) 빛의 3원색.